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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광자원을 개발하려면 지리산 역사부터 바로세워야
  • 조용호
  • 2015-11-09
  • 조회 406
  • 필자는 이미 30여년 전 지리산의 역사가 심각하게 왜곡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이 방면의 연구에 전념하여 왔습니다.

    관광자원을 개발하려면 먼저 역사성이 정립되어야 하는데,

    한국사의 중심에 있는 지리산의 역사는 조선왕조 건국명분인 숭유억불과 사대주의 정책의 일환으로 희생양이 될 수 밖에 없었다.

    한국사 왜곡의 주범인 이씨조선은 멸망한지 이미 한 세기가 지났고,

    지리산권의 주민들이 아직까지 희생양이 되어야 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이제라도 지리산의 역사를 바로 세우면 미래에는 엄청난 부가가치를 창출해 낼 수 있는 관광상품을 발굴해 낼 수 있을 것입니다. --

    요즘 한국사 국정화 문제로 찬반양론이 팽팽하게 맞서 열기가 뜨겁다. 이것이 어찌 보면 그동안 등한시했던 역사문제가 국민적 관심사로 대두되고 있는 현실이 국가의 먼 장래를 위해서는 오히려 다행스런 현상이라는 생각도 하게 된다.

    그러나 찬성하는 쪽이나 반대하는 쪽이나 겨우 현대사 부분을 두고 첨예하게 맞서고 있지만 정작 심각하게 왜곡되고 누락된 것은 상고사 부분이지 현대사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고조선과 신라도읍지는 같은 곳이다

    우선 고조선 도읍지의 현재 위치에 관해 살펴보기로 하자.

    후한서後漢書의 동이전(東夷傳)에서 말하였다.

    왕제(王制) 편에 이르기를 “동방을 이夷라고 한다.” 하였다.

    이(夷)라는 것은 근본이다. 어질고 생육(生育)하기를 좋아하며 만물이 이 땅을 저촉(觝觸)해서 산출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천성이 유순하고 도리로 다스리기가 쉬우니, 군자국(君子國)과 불사국(不死國)이 있기까지 하다.

    동이東夷는 아홉 종족이 있으니, 견이畎夷 · 우이于夷 · 방이方夷 · 황이黃夷 · 백이白夷 · 적이赤夷 · 현이玄夷 · 풍이風夷 · 양이陽夷 등이다.

    그러므로 공자도 구이(九夷)에 가서 살고 싶어 하였다.

    옛날 요임금이 희중(羲仲)에게 명하여 우이(嵎夷)에 살게 하였다. 이곳을 양곡(暘谷)이라고도 하니 대개 해가 뜨는 곳이다.

    중국에서는 우리나라를 동이(東夷)라고 부른다.

    아침 해가 처음 뜨는 곳을 동방이라고 하는데, 이곳은 인류문명의 발상지이기 때문에 공자가 동경했던 이상향이고, 옛날 요임금도 천하를 다스릴 때 제일 먼저 중신인 희중(羲仲)을 해 뜨는 곳인 양곡(暘谷)에 파견하여 해 뜨는 것을 경건히 맞이하여 절기에 맞춰 봄 농사일을 고르게 다스리도록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고조선 도읍지 아사달은 바로 요임금이 희중을 파견하여 살게 했던 ​우이(嵎夷) 지역이라고 하였다.

    유교의 중심 경전인 『상서尙書』요전(堯典)에서 말하였다.

    희중羲仲에게 따로 명하여 우이嵎夷에 살게 하니, 이곳을 양곡暘谷이라고도 한다. 떠오르는 해를 경건히 맞이하여 봄 농사를 고르게 다스리도록 하였다.

    공안국孔安國의 주석에, ‘동표(東表, 동방)의 땅을 우이嵎夷라고 칭한다. 양곡暘谷에서 해가 떠오르고 희중羲仲은 동방을 다스리는 관직이다.’ 하였다.

    조선朝鮮: 동표(東表)의 해 뜨는 땅에 (임금이) 살기 때문에 조선이라 이름 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평양부

    인류역사상 가장 이상적인 정치를 구현하여 태평성대를 누렸다는 요순시대에 요임금이 즉위하여 맨 처음 중신인 희중을 해가 처음 뜨는 신성구역인 우이(嵎夷)에 파견하여 살게 했다는 말이다.

    공안국의 주석에, 요임금이 희중을 파견하여 살게 했던 해 뜨는 구역인 우이를 혹은 동표(東表)라고도 하며, 희중은 동방을 다스리는 관직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조선왕조에서 간행한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바로 해 뜨는 구역인 우이에 고조선 단군왕검의 궁궐이 있었기 때문에 국호를 조선(朝鮮)이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동방은 지금의 어느 곳을 말하는 것일까?

    신라 효소왕(孝昭王) 때의 국사(國師) 혜통의 전기에 신라 도읍지를 해 뜨는 곳인 우이(嵎夷)라고 하였다.

    중 혜통(惠通)은 그 씨족을 자세히 알 수 없다. 세속인으로 있을 때 그의 집은 남산(南山)의 서쪽 기슭인 은천동(銀川洞) 동구에 있었다. …… 마침내 속세를 버리고 출가하여 법명을 혜통으로 바꿨다. 당나라에 가서 선무외 삼장(善無畏三藏)을 찾아뵙고 배우기를 청하니 삼장이, “우이(嵎夷)의 사람이 어떻게 법기(法器)가 될 수 있겠는가!” 하고 가르쳐 주지 않았다.

    또 이차돈의 순교에 관한 글에 이런 말이 있다.

    옛날 법흥대왕이 자극전紫極殿에서 팔짱 끼고 옷자락을 늘어뜨리며 부상扶桑의 구역을 굽어 살피며 좌우에 이르기를……

           이상 『삼국유사』

    여기에 자극전(紫極殿)은 신라 법흥왕이 나라를 다스리던 궁궐이고, 부상(扶桑)은 양곡(暘谷)에 있다는 신령한 나무를 말하는 것이니, 고조선과 신라는 같은 곳에 궁궐이 있었다는 결론이 된다.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는 내용이 삼국사기에서도 보인다.

    진성여왕 11년(897) 여름 6월에 왕이 태자 요(嶢)에게 왕위를 넘겨주었다. 이에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표문으로 아뢰기를,  “신 아무는 삼가 말씀드립니다.〔해 뜨는 우이(嵎夷)에〕살면서 희중(羲仲)의 관직에 있는 것이 신의 본분이 아니고, 연릉(延陵)의 절개를 지키는 것이 저의 좋은 방책인가 합니다.”라고 하였다.

    지금부터 4천 3백여 년 전인 중국의 요순(堯舜)시대에 간행되어 동양 최고(最古)의 고전으로 일컬어지는『산해경(山海經)』에는 고조선에 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동해의 안쪽 북해의 모퉁이에 朝鮮이라는 나라가 있는데 천독(天毒, 천축국)이다.

    그 사람들은 물에 살며 남을 아끼고 사랑한다.

    東海之內 北海之隅 有國 名曰朝鮮天毒 其人水居 偎人愛之

    『山海經』 18 海內經

    ‘조선 사람들이 물에 산다’는 말은 한반도의 골격을 이루고 있는 삼신산이 동해 가운데 있다는 전설에서 의거한 것이다. 이 구절에서 동진(東晋)의 대문호인 곽박(郭璞, 276~324)은 주석에서 이렇게 말했다.

    조선은 지금의 낙랑군이다. 천독(天毒)은 곧 천축국(天竺國)을 말한다.

    (그 나라는) 도덕(道德)을 귀하게 여기고 문자․서책․금․은․동전․화폐가 있었다.

    부도(浮屠, 불교)는 이 나라에서 나온 것이다.

    朝鮮 今樂浪郡也. 天毒卽天竺國 貴道德 有文書金銀錢貨 浮屠出此國中也

    곽박은 먼저 고조선 도읍지의 현재 위치에 관해 한사군 중에 낙랑군(樂浪郡)이라고 밝히고 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 진흥왕 이래로 중국 황실에서 역대 신라왕을 ‘낙랑군공 신라왕(樂浪郡公 新羅王)’으로 책봉하였다. 그러므로 여기에 낙랑은 신라 도읍지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리고 조선이 본래 천축국이며 불교의 발상지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신라 도읍지에 불보살(佛菩薩)이 산다는 지상천국인 도리천(忉利天)이 있다는 설과 통한다.

    신라의 대문호인 최치원 선생이 중국에 건너가 과거에 급제하고 문장으로 명성을 떨치고 28세에 귀국할 때에 같은 해에 급제한 중국인 친구 고운顧雲이 이런 시를 지어 주며 송별을 아쉬워하였다.

    내 들으니 바다 위에 금오金鼇 셋이 있어

    금오는 머리에 높고 높은 삼신산을 이고 있다네.

    산 위에는 구슬궁전 진주대궐 황금전각이 있고

    산 아래는 천리만리 넓은 물결이라네.

    그 곁에 한 점 계림鷄林이 푸른데

    오산鼇山의 빼어난 정기 기특한 인재 낳았도다.

    12세에 배를 타고 건너와 문장으로 중국을 감동시켰네.

    18세에 과거에 나아가 한 화살 쏘아 과녁을 깨쳤다네.

    『삼국사기』 46권 열전

    이 시를 보면 신라 도읍지는 신선세계인 삼신산에 있었으며 삼신산을 머리에 이고 있다는 금오산 곁에 계림이 있다는 사실이 뚜렷이 드러나 있다.

    그리고 신라 진성여왕 11년(897) 여름 6월에 왕이 태자 요(嶢, 효공왕)에게 왕위를 넘겨주었는데, 이때 당나라 황제에게 보내는 양위표(讓位表)에서

    ‘해 뜨는 우이嵎夷에 살면서 희중羲仲의 벼슬에 있는 것이 신의 본분이 아니고⋯〔(日邊)居羲仲之官 非臣素分〕’라고 하였다. 『삼국사기』신라본기

    요임금은 갑진(甲辰, B.C 2357)년에 즉위하고 그 후 25년이 되던 무진(戊辰, B.C 2333)년에 단군이 우이(嵎夷)에 궁실을 세우고 고조선을 개국하여 2천년을 누렸고, 후에 신라 역시 고조선을 계승하여 이곳에 도읍하고 천년을 누렸다.

    그리하여 역대 신라왕은 요임금이 설정한 희중의 관직에 해당한다는 말이다.

    이렇게 볼 때 고조선과 신라는 똑같이 해가 처음 뜨는 신성구역인 우이(嵎夷)에 도읍을 정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렇게 유서 깊은 신라 도읍지는 지금의 어느 지역을 말하는 것일까?

    최치원 선생이 지은 봉암사 지증대사(智證大師) 비문에 이런 구절이 있다.

    계림鷄林의 땅은 오산鼇山의 옆에 있는데/ 鷄林地在鼇山側

    예로부터 도교와 유교에 기특한 인재가 많았다./ 仙儒自古多奇特

    가련하게도 희중羲仲이 직분에 소홀하지 않아/ 可憐羲仲不曠職

    다시 불일佛日을 맞아 공과 색을 분변하였다./ 更迎佛日辨空色

    여기에 계림鷄林은 신라 초기에 김알지를 얻은 곳으로 천연적으로 닭이 홰를 치고 있는 형상의 산이고, 오산鼇山은 금오산金鼇山이라고도 하는데 삼신산을 머리에 이고 있다는 신화 속의 큰 자라 형상을 하고 있는 산이다.

    그리고 ‘가련하게도 희중이 직분에 소홀하지 않아 다시 불일佛日을 맞아 공과 색을 분변하였다.’라는 구절은 지증대사를 무명無明을 밝히는 불일佛日에 비유하고 당시 신라 헌강왕은 희중의 관직에 해당하기 때문에 헌강왕이 지증대사를 궁실로 영접하여 법문을 듣고 망언사忘言師로 책봉했던 일을 두고 하는 말이다.

    비록 짤막한 문장이지만 절묘한 문장이라 아니할 수 없다.

    왜냐하면 계림鷄林은 신라 도읍지에 있는 명승지이고, 오산鼇山은 삼신산 인근에 큰 자라 형상을 하고 있는 금오산을 말하는 것이니, 신라 궁실은 삼신산에 있었고 거기에 닭 형상의 계림과 자라 형상의 금오산을 찾으면 그곳이 바로 고조선 도읍지 아사달이며 신라 도읍지이기 때문이다.

    신선이 산다는 삼신산三神山은 봉래(蓬萊, 금강산) 방장(方丈, 지리산) 영주(瀛洲, 한라산)를 말하는 것으로, 현재의 평양이나 경주 지역은 여기에 해당되지 않고, 삼신산의 하나인 지리산이 여기에 해당한다.

           - 『에덴동산에 신라 궁궐이 있었다』중에서 -

    역사왜곡의 시기와 배경

    일반적으로 역사 왜곡을 이야기할 때 흔히 일본에 혐의를 두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신라 도읍지는 수미산 도리천(忉利天)이 있는 불보살이 사는 불국토이며 불교의 발상지이다.

    또한 신라 도읍지의 황룡사를 중심으로 흥륜사 사천왕사 영묘사 등 일곱 절터는 전불(前佛) 시대의 절터라고 하였다. 이리하여『산해경山海經』에서도 조선(朝鮮)은 천축국이라고 하였다.

    그런 신성한 곳이기에 고조선도 이곳에 도읍하고 2천년을 누렸으니 신라 천년과 합치면 이미 3천년 도읍지이다. 바로 이러한 사실이 이씨조선의 건국 명분인 이른바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를 국교로 도입하는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과 정면 배치되고 있는 것이다.

    고려 말기 명나라의 부당한 요구에 의해 이성계와 조민수 등이 요동정벌에 나섰다가 위화도에서 이성계의 주도로 말머리를 돌려 회군하여 오히려 고려군이 꺾이고 이로 인해 우왕은 왕위에서 물러나고 고려 조정의 마지막 보루인 최영 장군이 유배 길에 오르면서 이성계의 독무대가 되고 고려 조정은 서서히 멸망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성계는 허수아비 공양왕을 앞세워 우왕과 창왕을 시해하고 정적政敵들을 차례로 제거하고 마지막으로 정몽주가 살해되자 고려의 마지막 임금인 공양왕마저 시해하고 마침내 조선을 건국한다.

    건국 직후 조선 조정에서는 민심을 수습하기 위하여 국사인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서둘러 개간하기에 이른다.

    현재 유통되고 있는 삼국사기는 그 발문에 밝혀져 있듯이, 즉위 2년(1393) 7월에 경주 부사에게 공문을 보내어 8월에 판각에 착수하여 이듬해(1394) 4월에 완성된 것이다.

    그리고 삼국유사는 조선 중종 7년 임신(壬申, 1512)년에 개간(改刊)했는데, 이때 이계복이 지은 발문의 첫머리에 보면 “우리 동방의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두 책이 다른 곳에서는 간행된 것이 없고 오직 경주부(慶州府)에서만 있었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어떤 형식으로 역사를 왜곡했던 것일까?

    이와 같이 고조선의 도읍지와 신라 천년의 도읍지는 똑같이 삼신산의 하나인 방장산(方丈山, 지리산)에 있었는데,

    이곳은 후한서 동이전에서 밝히고 있듯이 인류문명의 발상지이며 또한 여러 종교에서 말하는 이상향이기도 하다.

    바로 이 한국사의 중심에 있고 시대를 초월하여 나라의 신성구역인 신라 도읍지를 오히려 백제 구차례현(仇次禮縣, 구례)이었다고 날조하여 유물을 수거하여 경주 지역에 봉분을 만들어 왕릉인 것처럼 꾸미고,

    또 고조선의 도읍지는 현재의 평양平壤이라고 날조하여 기존의 역사서를 개간한다는 명분하에 거기에 맞게 치밀하게 개작하고 나면 찬란했던 동방의 역사는 여지없이 초토화되고 백성들은 선악을 분간하지 못하여 그들의 건국 명분인 숭유억불과 사대주의에 부합되는 결과를 낳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범죄는 흔적을 남기는 법이다.

    신라 도읍지에는 인위적으로 조작할 수 없는 뚜렷한 증거물이 있다.

    전북 진안군에 가면 말의 두 귀를 닮은 형상의 마이산(馬耳山)이 있듯이

    신라 도읍지에는 여성의 생식기가 활짝 벌어진 형상의 여근곡(女根谷)

    삼신산을 머리에 이고 있다는 자라 형상의 금오산(金鼇山)

    닭이 홰를 치며 우는 형상의 계림鷄林 등이 지금 지리산의 서남단, 구례군 일대에 선명하게 모양을 갖추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왕조가 멸망한 지 한 세기가 지나도록 철저하게 현혹되고 있는 것을 보면 참으로 불가사의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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